어렸을 적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방학 동안 해야 할 숙제 리스트를 받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록엔 항상 ‘일기 쓰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엔 일기를 쓰는 게 왜 그리 싫었는지 저는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에 방학 동안 밀린 한 달 치 일기를 몰아서 쓰곤 했습니다. 대략 30일 동안의 이야기를 ‘이젠 써야 할 때’라며 자세를 잡고 앉아 2시간 안에 마무리했습니다. 당연히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한 달 전의 기억부터 하나씩 끄집어내야 하는 일이니 술술 써질 리가 없었고, 그렇다 보니 당시 겪었던 일과 감정이 담긴 생생한 ‘기록’이라기보단 ‘창작’에 가까웠습니다. 내용도 비슷 비슷했습니다. 특별히 놀러 갔던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기가 ‘오늘은 날씨가 ~ 했다.’로 시작해서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였다.’로 끝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이 비슷한 하루를 보냈으니 달리 쓸 말이 없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형식적인 일기 쓰기를 그만할 수 있을까 했더니 이후에는 어머니께서 검사를 하시더라고요. 밀린 만큼 맞았었는데 덕분에 꽤 많이 맞았습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일기 쓰기를 싫어했던 이유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비슷한 하루들에, 매번 비슷한 감정만 드는데 이게 과연 의미가 있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가 그 당시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이죠.
영화 속 스즈메도 저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23살 주부 스즈메는 자신에게 묻는 거라곤 거북이 밥을 잘 줬는지 뿐인 남편과 매일이 그저 그런, 보통의 무료한 일상을 보냅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에 싫증을 느끼다 못해 자신이 투명 인간이 아닐까,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스즈메가 여느 때와 같이 동네 골목길 계단을 올랐을 때, 하필 굴러떨어지는 사과를 피하려다 우연히 스파이 모집 포스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스즈메의 삶은 눈에 띄게 달라지게 되죠. 포스터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는 스즈메의 평범함을 완벽한 스파이의 자질이라며 비범하게 여깁니다. 앞으로도 최대한 평범하게 살면서 잠복하라고 활동자금도 쥐여주며 스즈메의 스파이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스파이 스즈메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 임무가 되면서 여느 때와 같은 똑같은 일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평범한 하루지만 이제 그녀에겐 특별한 의미가 담긴 '임무'였으니 말입니다. 스즈메는 점점 보통의 순간 속에서 빛나는 자기 자신과 마주해 나가는 듯 합니다.
행복의 반대말
"행복하지 않다고 모두 불행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던 스즈메,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행복한 삶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에 앞서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 걸까요? 애석하게도 저는 아직 ‘행복’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 봤을 때 생각나는 몇몇 장면들 속 감정들을 곱씹어 보면 어렴풋이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아직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 ‘행복’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어떤 것을 정의하기 어려울 때 그것에 반대되는 개념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반대의 것들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 조금은 더 와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행복’의 반대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제일 먼저 ‘불행’이 떠오르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불행(不幸)은 말 그대로 ‘행복하지 아니한 것’이니 행복의 반대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면 떠오르는 슬프고 애달픈 일, 불우한 일들과 불운한 하루들이 불행이라면, 과연 그렇지 않은 모든 경우에 우리는 행복을 느낄까요? 이와 반대로 행복을 느끼지 않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불행하다고 말할까요? 그렇지는 않으실 겁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으로 나누기에는 각각의 삶 속 다양한 감정과 순간들이 너무 많으니 말입니다. 행복한 것 까진 아니지만 마음속에 작은 미소가 지어지는 일부터 불행한 것 까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축 처지고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날처럼 말이죠. 이렇게 보면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단지 행복하지는 않은, 평범하고 사소한, 혹은 조금 기쁘고 조금 슬프며 약간의 뿌듯함과 조금의 우울을 느끼는 그 모든 감정들이 담긴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양 극단에 있는 행복과 불행에 가까워지다 멀어지다를 반복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평범함의 영역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척도는 사람마다 달라서 남들보다 행복과 불행의 사이가 먼 수직선을 갖고 있을 수도, 사이가 보다 가까운 수직선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 평범함의 공간에서 한 칸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한 줄 문장처럼 ‘산다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늘어가는 것’이라면 돌아보니 행복이었던 순간들을 지나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질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 평범함의 영역에서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찾아줍시다. 진정한 행복이 어디쯤 있는지는 어렴풋하여도 어제와는 조금 다른 감정과, 한 뼘 더 가까워진 행복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으며 매일 행복 요소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복에 가까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게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 하나, 둘씩 모여 특별한 우리의 세상에 하나뿐인, 진정 행복했던 삶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