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혹시 ‘심리학에 관련된 영화’ 하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23아이덴티티>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 영화 속에는 각각의 특징이 뚜렷한 여러 개의 인격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데요. 그래서인지 심리학을 전공하는 제 입장에서 심리학적으로 살펴볼 흥미로운 점들이 많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23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이를 진단하는 것에 대한 심리학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 보려고 합니다.

오늘 다룰 영화의 주인공 케빈은 헤드윅이기도, 데니스이기도, 베니와 제이드, 패트리샤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온순하다가도 단번에 괴팍해지기도 하며, 옷 스타일과 행동이 180도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는 마치 1인 n 역을 하는 연극배우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주인공 케빈이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와 몸을 나누어 쓰는 23개의 인격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별, 성격, 나이뿐만 아니라 기억과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23명의 다른 사람이 케빈이라는 몸만 공유하는 것처럼 말이죠. 심지어는 ‘케빈’도 그 인격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갖가지의 인격들은 케빈이 공유 자동차가 된 것 마냥 그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케빈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장악권인 ‘불빛’의 사용자를 정하죠.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 대화하고 나름의 협의도 하며 케빈의 안에 살아갔던 그들, 그런데 문제는 이 23가지의 인격들을 제외하고도 숨겨진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숨어있었던 어둠의 인격, 인격 24번 ‘비스트’는 케빈의 인격들 중 가장 가장 초월적이고 파괴적이며 악랄한 인격으로 그가 케빈의 주요 인격이 되길 바라며 그를 숭배하는 3개의 인격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스트에게 ‘불빛’의 장악권을 주기 위해 그에 대한 제물로 3명의 소녀들을 납치하게 되는데요. 영화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 다중인격 환자 ‘케빈’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각각의 인격별로 변화하는 케빈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케빈이 앓고 있는 다중인격장애의 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입니다. 해리(解離)가 ‘떨어져 나간다’라는 뜻이니 말뜻 그대로 해석해 보면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정체감이 떨어져 나가 생긴 장애입니다. 영화 속 케빈의 경우처럼 한 사람 안에 여러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 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특징인데요. 이 인격들은 서로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고 인격들끼리 갈등을 빚기도 하며 한 사람의 정신 안에 공존합니다. 케빈의 경우,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에 반대한 인격들이 있었던 것처럼요. 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인격들을 생각하면 이들이 마치 영화 <소울>의 감정 캐릭터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소울>에서는 머릿속에 있는 조종대를 어떤 감정이 잡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분이 정해지는데요. ‘기쁨이’와 ‘슬픔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추였던 것과 같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서도 인격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한 인격이 뇌를 점령하는 동안 벌어진 일들을 다른 인격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상실증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들에게 빈번하게 나타나는데요. 아무리 개성이 강한 인격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아예 개별적인 독립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몸을 공유하고는 있기 때문에 ‘개별 인격으로 나뉜다’에 집중하기보다는 각 인격들의 존재감이 흐려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알맞은 접근 방식입니다. 한 인격이 뇌를 점령하는 동안 다른 인격은 무의식 속에 들어간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아동기에 경험한 극도의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경험, 이로 인해 발생한 트라우마가 장애의 주원인입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 심한 학대를 당하거나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경험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정체성이 형성되는 어린 시기에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 학대나 외상으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힘든 현실을 피하기 위해 방어기제가 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기방어적 기제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내며 해리성 정체감 장애 증상을 낳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혹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동물이나 요정, 악마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약한 자신 대신 이 상황을 타개해 줄 강한 인격을 만드는 것이죠. 영화 속 케빈 역시 다른 해리성 정체감 장애 환자들과 같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지속적인 폭언과 폭행을 받았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속 고통이 너무나도 벅찬 나머지 24가지나 되는 인격들을 만들어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심리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인격을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기준으로 케빈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리검사는 크게 진단 검사와 비진단 검사로 나눌 수 있는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케빈과 같은 마음의 병을 진단하고 명명하여 이를 치료하기 위한 검사가 ‘진단 검사’이고 마음의 상태나 경향성 등을 고려해 마음의 본질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검사가 ‘비진단 검사’입니다. ‘진단 검사’는 이상행동이나 정신장애를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해 정신 장애를 여러 가지 범주로 체계적이게 분류하고 각 정신장애의 진단분류 기준들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질환진단및통계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 나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진단 기준을 보면

<해리성 주체장애의 DSM-5 진단기준>


A. 둘 또는 그 이상의 각기 구별되는 성격 상태로 특징지어지는 주체성의 붕괴가 나타나는데, 몇몇 문화에서는 빙의의 경험으로 보기도 한다. 주체성의 붕괴는 자신에 대한 감각이나 대행하는 감각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성과 감정, 행동, 의식, 기억, 감각, 인지 그리고/또는 감각-운동 기능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징후와 증상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관찰되거나 개인에 의해서 보고될 수 있다.


B. 매일의 사건의 회상, 중요한 개인적 정보, 그리고/또는 외상적 사건에 대한 회상에서 반복적인 공백이 있는데 일상적인 망각과는 차이가 있다.


C. 증상이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의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심각한 고통이나 장해를 초래한다.


D. 장애가 광범위하게 문화적이나 종교적인 행위에서 받아들여지는 정상적인 부분이 아니다.

라고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정의해 보다 명확히 진단할 수 있도록, 다른 장애나 질환과 구분되어 정확히 진단할 수 있도록 하는 분류체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비진단 검사’는 상태의 진단보다는 본질에 집중합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MBTI 검사와 DISC, TA, TCI, MMPI, 홀란드 검사 등이 이에 해당되는 데요. 아직까지 식지 않은 유행의 검사인 MBTI 검사 같은 경우, 비진단 검사의 하나인 ‘유형론 검사’에 해당됩니다. 이는 사람의 본질적인 성향을 보는 방법으로 사람의 기질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유형을 검사마다 코드나 번호 등으로 표현하죠. MBTI는 이 유형을 16가지의 알파벳 코드로 표현한 것인 셈입니다. 이러한 유형론 검사는 성격이 좋고 나쁨, 정상이고 비정상임을 ‘진단’하는 검사가 아니라 한 개인이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마음의 상태를 풀어나가는 검사로 ‘비진단’검사입니다.

+ 유형 검사에서 개인은 각 유형들 중 한 가지에만 속하게 되기 때문에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MBTI 검사는 '길러진 사회성을 가진 i' 와 같은 유형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MBTI에서는 E와 I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개인을 딱 하나의 유형으로 정의하다 보니 극단적으로 MBTI를 표현하는 콘텐츠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유형 검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면적 성격이 아니라 기저에 있는 마음을 보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이나 상황적 특수성을 제외하고 보다 무의식에 집중해 솔직히 답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 아픔으로 24개나 되는 인격을 만들어낸 케빈과 각 인격들이 가진 성격에는 그 인격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결핍과 아픔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격과 인격에도 지난날의 이유들이 담겨 있죠. '습관'보다는 짙고 깊은 이유를 담고 있는 성격, 여러분 안에 있는 성격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혹 구멍 나고 상처 난 마음이 있다면 정확한 '진단'으로 마주하고 '비진단적' 검사들을 활용해 계속해서 마음의 경향성들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의 양이 많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